나는 편하게 사는 걸 좋아해서, 굳이 꾸미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했다. 누워서 빈둥거리고, 헛짓하다 사고치고, 밤새 이불킥 하는 뻘짓도 하고, 날 것 그대로 나를 소개하며 '너네들도 사실 이렇잖아?' 하고 싶었다. 체면? 글쎄, 체면 문제는 아니다... 라고 말할 참이었지만, 날 것 그대로의 내 모습이 내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고 결국엔 그들과 나의 인생을 파괴할터인데, 사실 그들보다 내가 파괴되는 모습이 더욱 무서운 것이 아닐까. 그게 체면이라면 체면일지도. 이제는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청년이 아니게 되었고, 어찌보면 평범할지도 모르는, 그러나 위험한, 평범하게 위험한 남자가 되었다. 하긴, 이 나이 즈음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리오. 그렇게 비밀이 많은 평범한 남자가 되었다. 재미 없는 녀석. 별안간 옛 일기를 읽어보았다. 슬픈 날이 많았고, 버티기 벅찼으며, 그렇게 짧은 시 형식의 서정적인 일기를 쥐어짜낸뒤 잠 못이루는 긴 밤 어느 순간에 기절하듯 잠들었으리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삶이 이렇게 어떻게든 이어지는데, 왜 그렇게 힘들어해야만 했을까. 지금의 나는 왜 새벽을 기다리는가... 모르겠다. 여타의 많은 문학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 또한 무작정 기다려보는 것일까. 집에 가련다. 새벽이 와도 달라질 건 없고, 그저 하루종일 피곤하기만 할테니까. 너무 많은 새벽을 기다렸다. 그때도 알았고 지금도 알지만, 그저 새벽이 와주길 바랬다. 해가 뜨기도 전 어스름한 골목길 사이로 운동을 나선 어르신들, 아직 켜져 있는 가로등, 조각 같은 초승달. 그 옛날 할머니 손 꼭 잡고 동네 조그만 뒷산을 오르며 봤던 그 산내음 나는 기억들이 이토록 나를 기다리게 하는가. 외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던 차가운 공기에 나는 그렇게 설레었던 것인가. 집에 가자. 가서 자고, 일어나서 일하고, 또 자고, 그래야지.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니, 엉망진창 깨진 날붙이 같은 기억들은 두꺼운 낯가죽으로 돌돌 말...
그런가 싶으면, 보통 맞더라. 확증편향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인해 그런 미래를 끌어들인다면 결국 맞는 말이겠지. 최근에는 그래도 마음이 평안하다. 몸이 힘든건 매 한가지이지만 그래도 한번에 한두가지 정도만 생각을 할 수 있다는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 한번에 수십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는건 정말 사람을 미치게하는 경험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먹었던 불안증, 우울증 약은 결국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의 수를 줄여주는게 주효했던것 같다. 그땐 참 신기했지. 약을 먹으면 기적같이 찾아오는 평안함에, 내 온갖 고민들이 그저 화학반응일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이 나에게 한 줌 빛이었다. 나는 그저 고기 덩어리이고, 내 인생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는 깨달음. 그 당시 생각했던, 내 인생이 꺾였다는 판단이 딱히 틀린건 아니었을테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 놈 참 판단력 지렸다. "어찌됐든 살아가겠지, 좋은 날도 있을거야. 하지만 내 인생은 끝났어" 자기암시일까? 좋은 나날들이다. 어찌 잘 살아가고 있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