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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D

 보리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멸문당한 귀족가문 소년이 고난 끝에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낸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가문은 이미 멸망했기에 지켜낸 사람들이란 도망자의 삶 중에 새롭게 만난 인연들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주인공이었던 만큼 때때로 나 스스로를 보리스라는 캐릭터에게 이입해보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 삶이 그와같이 극적이거나 그다지 멋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시점에서는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이대로 무너지는 건 아닌가 싶은 위기들이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나의 노력은 미약했고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피나는 노력을 해왔기에 어떻게 보면 경지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임기응변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인구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유일한 사람은 아닐지언정 희소한 사람은 되지 않나, 스스로를 평하곤 한다. 아, 물론 별로 의미는 없다. 아주 한정된 상황 하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능력이기에. 요즘 유행하는 초능력물에 비유하자면 A에서 D 중 D 등급쯤에 해당하는 능력일까.

스스로에 대한 비판은 이 정도고, 굳이 누군가가 나의 삶의 관람한다면 썩 우연의 연속으로 보일법하다. 누군가의 소설 습작이라도 되듯, 나름대로의 큰 위기들이 있었고 마치 이야기속 주인공이 대부분 그렇듯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던 위기들을 극복해왔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면 한번쯤 생각해볼만 하다. 

'사실 나는 어떤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아닐까?' 

재미있는 상상이라고 잠깐 생각해보고는 까맣게 잊고 여느때와 같은 '이야기' 속 일상을 지내던 중 한 사내를 마주치면서 나의 이야기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만족스러운가요?"

출근길 지하철을 타기위해 길을 가던 중 얼핏 눈이 마주친 사내가 물었다.

'뭐야, 사이비인가?'

"예?"

원래라면 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쳤을테지만, '이야기'라는 뜬금없는 표현에 나도 모르게 대꾸를 뱉어버렸다. 속으로 괜히 대꾸를 해버렸다고 생각하던 찰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막 대단하진 않아도 나름대로 기승전결도 있고 나쁘진 않죠?"

그래, 나름대로의 위기와 극복이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기승전결이 있는 셈이라고 종종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옳았다. 옳긴한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예?"

맥락없는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게 최선이었다.

"나름 신경은 썼는데 너무 힘쓰다보면 망작이 되기도해서 적당히 해봤어요. 망작이 되버리면 저도 너무 미안하고 그래서.."

원래 사람은 맥락을 알아야 말뜻을 잘 알아듣는데, 갑작스러운 상대의 등장과 고백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 두뇌 속 음성인식 회로가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벙찐 표정으로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자 그가 체념한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는 분이신줄 알았어요. 제가 실례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하하!"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그에게 또다시 나도 모르게 맞절을 꾸벅 하고는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20여초 남짓한 짧은 시간이지만 어쨋든 급한 출근길을 방해받은 덕에 놓칠뻔한 열차를 간발의 차이로 뛰어들어 탑승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특정 단어들이 계속 신경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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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들의 인생을 이야기로 만들어서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개연성이 깨지면 스토리가 망가지고, 주인공에게 엄청난 패널티가 찾아옴

예를들어, 어떤 사람에게 날개가 돋아서 날아간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쓰면, 일년정도에 걸쳐 우울증에 걸리고 높은 곳에서 투신자살을 하게되는 식임.

로또에 연속으로 당첨되는 이야기를 쓰면 주인공의 삶에 엄청난 불운이 찾아오게 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로또를 사다가 한번 당첨되거나 그마저도 당첨되지 못하고 병으로 죽든 스스로 포기하든 죽음에 이르게 됨.

길 잃은 할머니를 위해 친절한 사람을 만나 집으로 무사히 간다는 이야기를 쓴다거나, 밤새 운전을 한 트럭운전자를 위해 무료 커피를 나눠주는 친절한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를 쓰는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

나와 크게 관련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건드린 경우에는 나에게 전혀 직접적인 리스크가 없었다.

세계관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무리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건 개개인의 작은 이야기들만 바꿀 수 있음.

내 이야기도 바꿀 수 있으나 리스크가 큼


큰 개연성을 위해서는 큰 이야기를 만들어야하고,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면으로 써서 전체적인 개연성을 지켜야함.

이렇게 보면, 내가 커리어에서 성공에 이르기까지 잃었던 것들이 모두 개연성의 재물이었던 것이구나. 정말 죽느니만 못한 사건들의 연속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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